6개월 소회
로컬로 나온 지 6개월 정도가 되었다.
‘로컬’은 흔히 의사들 사이에서 대학병원이 아닌 개원가에서 일하는 것을 말한다. “페이닥터” 혹은 “봉직의”라고 이해하면 쉽다.
내가 대학병원에서 아주 오랜 세월을 보내고 나온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전문의라면 누구나 나오기 전에는 대학병원 경험만 있기에, 처음 로컬로 나와 적응하며 어려운 점도 있었고 또 좋은 점도 있고 여러 가지 느끼는 바가 많았다.
대학병원을 나올 때는 여러 가지 걱정이 많았다.
내가 하고 싶은 진료를 할 수 있을지,
여러 가지 수술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을지,
무언의 압박이 있지는 않을지 등등…
물론 나보다 먼저 나간 같은 과, 다른 과 선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 이야기가 달랐다.
누구는 만족스럽다고 하고, 누구는 불만을 이야기했다.
심지어 같은 병원을 두고도 평이 달랐다.
그래서 남의 이야기는 그닥 도움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뭐든 첫인상이 중요한 사람이어서, 면접을 보러 가서 느껴지는 병원의 분위기와 대표원장님과의 대화에서 받은 내 느낌만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6개월을 보낸 지금, 나는 아주 만족스러운 의사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이 자리를 잡은 것 같아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고자 글을 써본다.
사실 너무 나태해져서 쓰는 글이기도 하다.
이 글의 목적은 ‘공부 좀 하자’고 스스로 다짐하며 써 붙이는 글이라고 해야 할까.
로컬로 나와 보니…
나오기 전에 몰랐던 것들, 그리고 오해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차례
체력이 제일 중요
로컬로 나와서 처음 느낀 건 ‘몸이 너무 피곤하다’는 것이었다.
의사들은 노동 강도를 흔히 몇 타임 외래를 하는지, 수술 타임은 몇 개인지, 평균 외래 환자 수나 수술 건수로 판단한다.
하루를 오전·오후 두 타임으로 나누어 주 5일 기준 풀타임 근무는 10타임의 외래를 보는 것이다.
대학병원에 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대학병원 의사들은 일주일에 절반 정도만 진료가 있다. 그것도 오전이나 오후 한 타임만 있는 날도 있으니, 일주일에 3~4타임 정도 외래를 본다고 생각하면 된다.
거기에 수술 타임이 1~2개 정도 더해진다.
즉, 주 4~6타임 정도 일하게 되는 셈이다.
남은 시간에는 연구, 공부, 수술 준비 등 할 일이 많긴 하지만, 근무 시간만 놓고 보면 그렇다.
로컬은 다르다.
근무 계약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은 풀타임이다.
게다가 토요일까지 일하는 곳이 많아 일주일에 10타임 이상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안과 수술은 몇 시간씩 걸리는 경우가 드물다 보니, 수술을 하고 다시 진료를 보고, 또 수술을 하고 다시 진료를 보는 식이다.
이렇게만 봐도 대학병원과는 피로도의 차원이 다르다.
며칠 진료하고 나니 너무 피곤했는데,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원장님이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는 걸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점점 덜 피곤해졌다.
대학병원에 10~20년간 있다가 나오신 분들은 풀타임 근무가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숨은 고수들
이제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TV에 나오는 ‘쇼닥터’나 흔히 알려진 ‘명의’라는 사람이 반드시 최고의 실력을 가진 건 아니다.
‘명의’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내 기준 첫 조건은 ‘실력’이다.
일반 대중들의 생각과는 달리, 생각보다 대학병원에 실력이 부족한 의사도 있고, 반대로 로컬에 숨은 실력자들이 많다.
수술 공장
대학병원에서 원하는 만큼 수술을 하던 시절을 떠나면, 앞으로는 이렇게 못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수술은 오히려 로컬에서 더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로컬에서만 하는 수술들(라섹, 스마일 등)도 많아, 더 다양하게 접하게 된다.
흔히 성형외과나 안과에서 부정적으로 쓰이는 ‘수술 공장’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많이 한다는 게 꼭 나쁜 걸까?
그만큼 잘 되니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결국 많이 하는 곳이 잘하고, 많이 하는 사람이 잘한다.
물론 무리하게 수술을 하거나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운영하다 병원을 닫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곳은 오래가지 못한다.
(암 수술처럼 대학병원에서만 가능한 수술은 여기서 말하는 범위가 아니다.)
그 위의 무언가
로컬에 나와서 가장 크게 느낀 건, 실력은 기본이라는 점이다.
그 외에 ‘무언가’가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에서는 ‘라뽀 : 라포르(rapport)’라고 비슷한 것으로 접하긴 하는데, 환자와 의사의 상호 신뢰 관계를 뜻한다.
국가시험 실기(OSCE)에도 평가 항목이 있어 점수를 매긴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아, 그러셨군요” 같은 공감 표현이 대표적.
하지만 이건 단순히 점수로 매기고 훈련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라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이걸 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대충 생각나는 단어들로는
“매력”
“아우라”
“기운”
“포스”
“풍채”
“결”
등이 있겠다.
가끔 환자들이 이렇게 말한다.
“A 원장님이 준 약이 훨씬 잘 들어요.”
“나는 꼭 B 원장님을 봐야 안심이 돼요.”
“C 원장님한테 수술을 받았어야 했는데, 그러면 더 잘 보일 텐데…”
똑같은 약이고, 똑같은 진료, 똑같은 수술이어도 말이다.
이건 어디 가서 배울 수 없다.
친구 사귀는 법이나 연애를 글로 배울 수 없듯, 많이 부딪히면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하지만 고집을 버리고 열린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
그 과정에서 고수들의 조언을 참고 정도로 들으면 도움이 된다.
가끔 환자가 진료실에서는 못한 이야기를 밖에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제3자를 통해 듣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다.
공부할 시간
결국 이 이야기를 하려고 쓴 글인데, 길어졌다.
로컬에 나오면 공부할 시간이 없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말이 있지.
“그때 아니면 공부할 시간 없다.”
레지던트 때는 가장 공부하기 좋을 때라고들 하지만, 일이 많아 현실적으로 어렵다.
전문의 시험 공부 때 가장 많이 공부하게 되는데, 그래서 ‘이때 공부한 게 평생 간다’는 말이 있다.
펠로우 때는 한 분야만 파다 보니 다른 분야는 소홀해진다.
임상교수 시절에도 비슷하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하게 된다.
로컬에 나오니 머리가 아파진다.
일단 피곤해서 공부를 못 하고, 조금 체력이 회복되면 놀고 싶어진다.
역시 사람은 어느 정도 강제성이 있어야 뭘 하는 동물인가 보다.
내가 블로그를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래도 공부를 조금이라도 하자’는 의미가 있었다.
어떤 것에 대해 정말 잘 안다는 건, 누군가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 때다.
더 나아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쉽게 풀어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진짜 아는 것이다.
대학병원에만 있다 보면 이 눈높이가 이상해져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의사들도 많다.
어렵게 설명하면 환자가 대단해하는 줄 아는 건 착각이다.
포스팅을 하다 보면 어떻게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고, 나 역시 깨닫는 게 많다.
나도 공부가 되고, 환자도 이해가 되는 ‘윈윈’이다.
앞으로 못해도 일주일에 1개는 공부해서 올리는 포스팅을 해야겠다.
그래서 의학서적을 샀다.
한 권에 보통 10만 원이 넘는 책들이라 망설였지만, 안 되겠다 싶어 구입했다.
세상이 좋아져서 영어책도 E-book으로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이제 공부하기 어렵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다.
나중에 포스팅을 하겠지만, 최근에 아주 재밌는 책을 하나 읽어서 기대가 된다.
생각 없이 적다 보니 글이 두서없이 길어졌는데,
어쨌든 앞으로 할 게 많다.
화이팅.
존경합니다 선생님 저도 로컬로 나온지 이제 6개월입니다. 늘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같이 화이팅합시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것저것 검색하다 우연히 선생님 블로그를 알게 되어 질문도 드리고 올리시는 글들, 이전 게시글도 잘 읽고 있습니다. 좋아요 표시? 같은 게 없어서 글을 읽을 때마다 늘 아쉬운데.. 임상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하려고 하면서도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게 유익한 내용들을 정리해서 설명해주시는 게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로컬에서 일하시느라 바쁘실텐데 블로그 활동도 지속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같은 안과 증상이나 질환이 있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과 위로가 됩니다. 선생님 응원합니다!